그 와중에 문장은 아름답고 섬
그 와중에 문장은 아름답고 섬뜩하고 칙칙하고 묵직하다.️ 저항의 멜랑콜리 기록15 & 397동쪽으로 흘러가던 구름 사이로 희미한 햇빛이 내비치는 순간이었다. 부엌은 어스름에 잠겨 있어서, 벽 위에 그려지는 얼룩의 떨림이 그림자일 뿐인지, 아니면 확실하다고 믿어온 생각 뒤에 감취진 절망의 불길한 혼적인지 알 수가 없었다.25헝가리어는 쉼표만 붙이면 한없이 문장이 이어질 수 있는 구조라고 한다. 띄어쓰기도 없고, 마침표도 없는 이 페이지는 잠깐 편집오류인 줄 알았다.하고자만 하면 영원히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단어들이 예상할 수 없이 겹치고 더해져 만들어내는 이미지들이 문장을 곱씹고 또 곱씹게 했다. 이 책이 이 작가님의 제일 쉬운 책이라는데, 다음부터는 마침표도 없고 문장도 한없이 늘어진다는데. 읽어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영화가 롱테이크로 미동도 없는 장면을 만들어 관객을 강제 사유로 들이미는 것처럼 글로도 그리 할 수 있겠다, 한다. 글자가 눈을 붙잡고 늘어진다. 생각이 흘러가려다 멈칫한다. 아유 강렬하다.팽팽한 정적 속에서 말파리의 윙윙대는 소리와 품위없는 빗소리만 들렸다. 끝나가는시월의 밤은 고유한 리듬을 갖고 있었는데, 그것은 말이나 상상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어떤 질서에 따라 나무들을, 비와 진창길을, 노을과 서서히 내려앉는 어둠을, 피로하게 움직이는 근육을, 정적을, 구부러진 길과 풍경을 두들겼다. 머리카락은 무리하게 움직여야만 하는 음과는 다른 리듬을 따랐고, 성장과 몰락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럼에도 수없이 두들기고 되울리는 한밤의 소리들은 짐짓 절망을 가리는 한 가지 효과를 거두고 있었다. 한 장면 뒤로 불현듯 또 다른 것이 모습을 드러내고, 눈에 보이는 경계를 넘어서면 현상들은 서로 관련이 없어졌다. 마치 영원히 닫히지 않는 문처럼 틈이, 균열이 있었다. 132#영화원작@midoldol#헝가리소설암울한 묵시록 문학의 대가인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412쪽 ㅣ548g ㅣ137*232*30mm또 어디선가 읽기를, 소설을 쓸 때 결론을 정하지 말아라- 등장인물들이 저희들의 끝을 결정케 하라, 작가는 등장인물들이 가는 길대로 쓰기만 하라, 고 했는데. 이 책은 그런 원칙과는 맞지 않아 보인다. 처음부터 구조와 결말을 짜놓고 시작한 책 같다. 이 책이 데뷔작이며 평생 한권만 쓰려고 했다는 작가님은 어떻게 이 책을 구상했을까. 혹자는 목차에서 말해주듯 - 원형으로 돌고 도는 이야기라 하고 혹자는 이리시마야 2인조 (공산당) - 주민 - 의사 (아무것도 하지 않는 관찰자) 의 삼각 구도라고도 했다. 소돔과 고모라가 연상되는(거기까지는 아닌가...)이 마을에서 이리미아시라는 사기꾼 그리스도의 강림에 여러 은유가 있다고도 했다. 카프카는 "개인"을 말하지만 크라이너호슬라이 라슬로는 "군상"의 부조리를 얘기한다고 역자인 조원규님은 해설에 적으셨다. 소외된 무리에서 더 소외당하는 약자, 그걸 이용하는 무리, 자기의 탓만 아니면 되는 인간들, 살기에 바쁘지만 스스로를 "직접" 구원할 생각은 없는 인간들... 작가님은 이걸 왜 쓰셨나. 무얼 말하고자 하셨나. 영화에도 깊이 관여해 감독 벨라타르를 거장의 반열에 올렸다는 작가님은 소떼의 움직임을 담은 그 롱테이크를 통해 관객 고문을 하고자 하지는 않았을텐데. 읽기는 어렵지 않았으나 길게 여운이 남는다. 의문과 함께.#헝가리문학#헝가리소설#아포칼립스#세계문학페트리너는 소년의 얼굴에 담배 연기를 뿜었다. "잘 알아뒤라. 인생의 비밀은 농담에 있다는 걸." 그가 엄숙하게 말했다. "일은 어럽게 시작해서 나쁘게 끝난단다. 중간에 일어나는 일은 다 좋은 법이야. 네가 걱정할 건 마지막 순간이란다." 이리미아시는 아무 말 없이 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363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Krasznahorkai László, 1954~, 헝가리) 작가님은 대체 이 책으로 뭘 말하고자 했을까. 나는 이 마을의 무기력한 주민들처럼 내가 살고 있는 곳이 두렵고 무서웠다. 상가 여러 곳에 붙은 "임대", "보증금 0원", 핸드폰만 바라보고 있는 가게 주인, 인적이 드물어진 길들, 울긋불긋하게 타들어가는 산의 사진, 한동안 불길이 잡히지 않을 거라는 뉴스, 죽은 사람과 그 과거에 대한 이야기들, 해결되지 않는 이슈들, 끝없는 분열의 목소리, 자기가 옳다 외치는 시끄러운 입모양, 피어나는 꽃들과 뿌연 하늘, 지난주엔 눈이 왔는데 이번주에는 반팔을 입어야 하는 날씨... 밤과 새벽에 책을 읽고 낮에 세상으로 나왔더니 모든 것이 오버랩되어 덮쳐왔다. 아니 그냥 옛날 얘기라고 치부하고 읽을 수 있으면 참 좋았을텐데. 나의 과장된 생각이기를 바랬다. 오바한다 오바, 스스로를 다독였다.파리리뷰 인터뷰 중에서제대로 읽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작가님의 악명(?!)만큼 읽기 어려운 소설은 아니었다는. 그래서 이 소설이 입문작으로 추천되고 있는 듯 하다. 이 다음부터는 훨씬 더 어려운 작품을 만나게 될거라는 경고, 더불어 이 강렬한 문장들을 안 읽고 배기겠냐는, 그런 선포 같은 소설이었다.
그 와중에 문장은 아름답고 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