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주 등 어루만지는 할머니 손길 같은 숲길 [특집 봄은 땅끝에서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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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희성 댓글 0건 조회 1회 작성일 25-04-19 18:47본문
춘천개인회생봄을 찾아 갔다. 급한 성미 이기지 못하고, 더디 오는 봄을 마중했다. 남쪽으로 갈수록 바람의 날이 뭉툭해졌다. 땅끝 해남에 이르고서야 살랑살랑 흔드는 강아지 꼬리처럼, 바람이 순해졌다. 봄이 오는 길목에 쪼그리고 앉아, 피어나는 꽃잎을 눈으로 와락 껴안았다. 봄은 땅끝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특집 '봄은 땅끝에서 온다'는 해남의 걷기길과 축제, 먹거리를 맛깔나게 엮었다.
걸을수록 잠 들었다. 소란했던 마음이 쌔근쌔근 가라앉고 있었다. 무던한 동백나무의 짙은 초록, 코가 뻥 뚫리는 것 같은 개운한 공기, 재잘거리는 물소리, 푹신한 야자매트가 있는 숲은 걸을수록 긴장이 풀렸다.
주름이 자글자글한 할머니가 하염없이 등을 어루만지는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대흥사 천년숲길, 이름처럼 연륜 있는 나무가 우아한 자태로 전설 몇 개씩 비틀어 가지를 뻗었다. 계곡 따라 이어진 숲이라 습도와 산소가 충분히 몸에 흡수되어서일까. 도란도란 쏟아지는 햇살과 고즈넉함이 도시의 피로를 증발시키는 걸까. 걸을수록 소란한 마음을 잠재우는 숲, 봄이 불어오는 길목에 섰다.
"순진했던 시절은 끝났다"며, 바닥에 떨어진 빨간 동백꽃. 실연과 치욕이 찰나의 쓰나미처럼 지나고, 추락한 첫사랑 순정. "툭, 툭" 떨어지는 동백꽃의 붉은 비명을 성장통이라며 묵묵히 바라보는 아름드리 느티나무.
바닥에 떨어진 빨간 동백을 보석인양 귀하게 줍는 이는 젊은 아웃도어 마니아 윤도란(@y__doran), 조미옥(miok_jo_)씨. 꽃과 함께 굳었던 얼굴이 환해진다. 아는지 모르는지 봄까치꽃이 파란 망울을 천연덕스럽게 터뜨리고, 아무렇지 않게 넓고 깊은 숲은 봄이 산란하는 곳으로 걸음을 이끈다.
두륜산의 맥박이 고스란히 숲길에 깃든 걸까. 걸을수록 얽힌 마음의 실타래를 풀어내는 숲길의 신비로움. 숲이 사람을 꿰뚫어 볼 수 있다는 두륜의 무해한 상상력이 연기처럼 모락모락 허공을 채운다. 서산대사와 초의선사가 사랑했던 숲답다. 서산대사는 숨을 거두기 전 제자들에게 말했다.
"내가 죽으면 옷과 공양 그릇을 해남으로 보내라. 그곳에는 두륜산 대흥사가 있는데 남쪽에는 달마산이, 북쪽에는 월출산이 보이고, 동쪽에는 천관산, 서쪽에는 선은산이 있어 참으로 좋아하는 곳이다."
삼나무, 편백나무 있는 숲은 '단순명료'하다. 직선으로 뜻을 펼치며, 속내를 감추지 않는다. 곧은 자세와 정갈한 공기가 숲을 단순하고 명료하게 만들어 놓았다. 초의선사의 제자들인 양 참선하듯 고요 속으로 침전하는 숲은, 걸을수록 사람의 마음을 정화하는 힘이 있는 것 같다.
물소리, 새소리가 봄의 희망을 연주한다. 걸음 멈추고 가만히 있으면, "뽕" 꽃잎 틔우는 소리가 들릴 것만 같다. 숲길을 지나 대흥사 쪽으로 간다. 누워 있는 부처의 모습이라는 두륜산 곁으로 다가간다. 세상을 잠깐 물려 놓고, 수묵화 속으로 간다. 나무를 가만히 바라보고, 구름을 조용히 쳐다보는 것만으로 봄이 와서 휘감긴다. 해남 사람들 모르게, 봄을 한 움큼씩 주머니에 눌러 담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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