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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원왕후, 숙빈, 연잉군 노론, 영빈 등은 공동 운명체였고 영빈은 가교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밖에 나간 후궁이 나대고 다니니 소론의 입장에서는 영빈의 존재가 거슬릴 수밖에 없었다. 경종 즉위년에 경종 독살설이 불거지고, 소론은 "김성궁인" 사건이라고 부르며 영빈을 범인으로 몰았다. 이 사건은 계속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다가 경종 4년에 외사촌 동생인 이진검에 의해 영빈의 이름이 공개적으로 지목된다. 이진검은 효종 때 인조의 후궁인 조귀인을 처형한 적이 있었으므로 영빈을 처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영빈이 이렇게 범인으로 몰리자 인원왕후는 이진검의 고모이면서 영빈의 이모인 이씨(숙명공주 아들 심정보의 아내이자 경종의 내종숙모)를 시켜 이진검을 설득하게 만든다. 인원왕후의 발 빠른 움직임 덕분에 영빈은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운이 좋게도 그해 8월에 경종이 죽고 왕세제가 왕위에 오르게 되면서 영빈의 혐의는 당연 무혐의 처리되었다. 만약 인원왕후가 제때 나서지 않았더라면 영빈은 죽은 목숨이나 다름 없었을 것이다.영빈의 이런 역할 덕분에 영조는 영빈에게 많이 고마워했다. 영조는 직접적으로 영빈을 어머니라고 불렀을 뿐만 아니라 영빈이 죽은 후에는 영빈의 사당을 봉궁했다. 원래 후궁의 사당은 방(房)을 쓰고 궁(宮)은 세자와 세자빈의 사당에 쓰인다. 경종은 생모인 희빈으 옥산부대빈으로 추숭하여 사당을 궁이라고 썼다. 인조 또한 자신의 부모를 왕과 왕후로 추존하기 전까지 사당에 궁을 썼다. 그러나 이들은 왕을 낳은 부모였으므로 영빈과 경우가 달랐다. 자식 한 명 없는 후궁의 사당에 궁을 쓰는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또한, 대신들에게 영빈에게 치제하라고 했다. 영조는 영빈의 사당에도 자주 찾아갔는데 이는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다. 생모도 아닌 영빈을 그렇게 지극정성으로 대할 필요가 없는데 영조가 굳이 이런 대우까지 해준 것을 보면 개인적으로도 고마움이 상당히 큰 모양이다. 영조 29년에 사친인 숙빈에게 시호를 내린 이후 영조는 영빈의 친척 가운데 벼슬이 없는 사람을 등용했으며, 화유옹주를 영빈의 봉사손으로 보낸다.숙종의 여인들에 대해 조사를 하다보면 참 흥미로운 인물이 많다. 조선시대 후궁 중에서 영빈처럼 정치적인 인물은 없을 것이다. 다른 의미로 정말 한획을 그은 인물이라 드라마에 잘 나오지 않는게 아쉬울 따름이다. 영빈의 행보를 보면 숙종에게 미움을 살 수밖에 없었다. 왕의 후궁이 왕의 동정을 살피고 이를 자신의 친정가문에게 전달하는데 싫어하질 않을 왕은 없을 것이다. 이런것을 보면 영빈이 남편에게 어떻게 사랑받아야 하는지는 방법을 몰랐던듯 하다. 집안에서 보고 자란게 정치라서 그런지 본인의 삶을 너무 그쪽으로 충실히 살은것 같다. 이미 경종이 즉위한 마당에 연잉군에게 모든 것을 건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인데 굳이 이런 일을 자처한 것을 보면 '모아니면 도'를 선택한 것 같다. 경종이 급서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영빈 가문은 머지않아 멸문지화당했을 것이다.영빈은 숙종의 후궁 중에서 숙빈 최씨와 친분이 두터웠다. 영빈과 숙빈은 한 살 차이로 숙종이 여러 번 환국을 일으킬 때 정치노선을 같이 했다. 숙종 20년에 갑술환국이 일어났을 때 숙빈 최씨가 숙종의 총애를 받으면서 인현왕후와 영빈이 함께 복위되었고, 숙종 27년에 장희빈이 축출되었을 때도 숙빈이 밀고하여 남인 세력과 장희빈이 모두 축출되었다. 숙빈 덕분에 영빈은 자신의 신변 뿐만 아니라 가문의 위세를 유지할 수 있게 되었고 그래서 영빈은 숙빈이 고마웠을 것이다. 숙빈은 자신의 아들을 보호해줄 사람을 필요했기 때문에 연잉군을 영빈에게 보내기도 했다. 영조는 영빈이 죽었을 때 자신이 항상 영빈에게 "어머니"라고 불렀었다고 회고했다.영빈 김씨는 안동 김씨 가문 출신으로 김창국의 딸이며 어머니는 전주 이씨다. 이 집안에 대해 잠깐 설명을 하자면, 당시 조정에 막중한 임무를 맡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을 뿐만 아니라 집안이 대대로 왕실과 인연을 맺고 있었다. 영빈은 정궁으로 들어와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는데 굳이 숙종의 후궁으로 들어오게 된 이유는 서인들이 장희빈과 남인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숙종 12년에 간택후궁으로 뽑혀 들어갔다. 영빈과 인원왕후가 서로 인연을 트게 된 것은 숙종 28년에 인원왕후가 숙종의 계비로 선발되어 들어왔을 때이며, 영빈이 인원왕후보다 17살 나이가 많았다.참고: 이미선. "경종대 왕실여성들의 정치적 행보와 역할." 韓國史學史學報 -.46 (2022): 389-426.이러한 집안 관계로 인하여 인원왕후는 노론 세력들과 교감했다. 김창협 형제들은 김주신에게 노론이 세운 계획을 알려 주었으며, 이를 전해 들은 김주신은 인원왕후를 찾아가 노론의 움직임을 알려줬다. 경종실록에 따르면 김주신은 평소에 오해를 살까봐 친구들을 멀리 했지만 김창협 형제만큼은 아무런 거리낌없이 왕래를 하고 다녔다고 한다. 김주신은 김창협의 형제인 김창집으로부터 인원왕후에게 연잉군의 일로 아뢸 것을 권유받아 이를 주선하기도 했다. 김창집과 김주신 사이에 오고 간 말은 영빈과 인원왕후 사이에서 더 구체화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숙종이 죽은 후 영빈은 사가로 나가서 지냈음에도 인원왕후에게 정치적 조언을 해주는 일을 도맡아 했던 것을 보면 영빈은 정사에 개입하는 것을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영빈이 인현왕후와 함께 폐출되었을 때 숙종은 왕의 동정을 살피고 이를 가문에 알린 죄를 받았는데 영빈의 이러한 행동을 보면 숙종의 말이 거짓말이라고 보기도 힘든 것 같다.영빈은 후궁이었고 여성이었지만 상당히 정치적 행보를 보이면서 살았다. 조선 후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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